전 대 열 大記者. 전북대 초빙교수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 선열은 위대하다.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지푸라기처럼 버릴 수 있는 용기는 범인들로서는 감히 생각하기조차 어려운 일이다. 다른 나라에도 그런 분들이 많이 있을 것이나 외적의 침략을 받아 나라를 빼앗길 위기에 처했을 때 과감히 일어나 저항운동을 펼치다가 총탄에 희생되거나 감옥 속에서 죽어간 이들이 어찌 우리나라에만 있을까. 그러나 한국은 지정학적으로 매우 어려운 조건 하에서 생활해온 민족이다. 역사학자의 기록에 의하면 외국의 침입을 받은 횟수가 크고 작은 것을 모두 합하여 980여 회로 발표되었다. 나로서는 이를 고증할 수 있는 기록을 가지고 있지 못하지만 북쪽으로는 중국 대륙과 맞붙어 끊임없는 침략을 받아야했으며 남서쪽으로는 바다가 가로놓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섬나라 일본의 해적질에 괴로워해야했다. 오랑캐와 왜놈들의 침략과 약탈 덕분에 지금도 우리나라 문화재는 중국이나 일본에 더 많이 있다는 통계까지 나올 정도다. 이처럼 나라가 어지러울 때마다 우리 민족은 과감히 저항투쟁을 주저하지 않았던 찬연한 역사를 자랑한다. 특히 근대에 접어들면서 서세동점의 물결이 굽이칠 때 날쌔게 명치유신을 통하여 서구화로 변신한 일본은 제국주의의 탈을 쓰고 한국을 강제병합하고 동남아 일대를 휩쓰는 만행을 서슴지 않았다. 36년이라고 하지만 사실상 50년이 넘는 기나긴 세월 일본의 압제를 받았던 우리 민족은 끈질긴 투쟁을 통하여 독립운동에 매진했다. 3.1만세운동, 6.10만세운동, 광주학생운동 등 독립운동의 역사를 빛낸 항쟁의 역사는 민족사의 거대한 발자취로 남아있다.
이를 주도했던 순국선열들의 이름은 우리의 가슴에 그대로 새겨진 역사다. 이준, 안중근, 윤봉길, 백정기, 이봉창 등 투쟁의 전면에서 산화했던 분들은 말할 나위도 없으며 김구, 조소앙, 이범석 등 지도자들도 수없이 많다. 조국 광복 후에 국립현충원에 모셔지고 효창공원 등에 모셨지만 우리들이 정성은 아직도 부족하다. 그나마 이름이라도 알려진 분들은 현충원 등에 모실 수 있었지만 독립군에 가담하여 왜군들과 치열한 전투를 하다가 숨진 분들도 상당수다. 그들 중 후손이 없는 광복군 18위가 지금도 수유리 합동묘소에 고이 잠들어 계신다. 이 분들을 추모하는 행사가 순국선열 추모회(공동대표 전대열, 조대용, 김선홍) 주최로 추석과 설날 그리고 광복절, 현충일에 개최되어 오고 있는 것만도 그나마 애국지사에 대한 자그마한 정성의 표시라고 할까. 이분들의 합동묘소는 국가에 대한 헌신도에 비해서 너무나 초라하다. 묘역을 새로이 정비하고 공원화 작업이 필요하다. 때마침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던 김주열 열사의 무덤이 있는 전북 남원시 금지면에 열사의 민주의지를 본받을 수 있는 추모공원이 완공되었다. 김주열은 4.19 당시 남원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이모가 살고있는 마산상고에 합격한 상태에서 3.15의거에 참여했다. 4.19혁명은 자유당 정권의 12년에 걸친 부정과 독재를 타파하기 위해서 학생들이 궐기했던 시위로 시작되었다. 2월 28일 대구 고등학생들의 데모로 시작된 부정선거 규탄 시위는 급기야 선거날인 3월15일 마산에서 대규모로 터졌다. 이날 마산에서 희생된 학생이 7명이다. 그중에서 김주열은 행방을 찾을 수 없었다. 어머니 권찬주 여사는 남원에서 급히 달려와 1주일 동안 마산 시내를 누비며 “내 아들 김주열을 찾아내라.”고 울부짖었으며 모든 마산시민이 이에 호응했으나 김주열은 생사조차 알 수 없었다. 부정선거를 규탄하고 이승만 정권의 하야를 촉구하는 데모 행렬은 전국적으로 번져 나갔다.
박근혜 퇴진을 외치는 시위대가 광화문을 누볐지만 경찰과 시위대 간에 아무 마찰이 없었기에 탄핵은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었지만 4.19때는 경찰의 발포로 인하여 186명의 희생자와 6천여 명의 부상자를 내며 이승만 정권은 끝났다. 대구 2.28에서 마산 3.15, 그리고 4.4전북대 시위, 4.18고려대 시위는 4.19혁명의 획을 긋는 결정적 역할을 했으며 특히 4월 11일 김주열의 참혹한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 떠올랐을 때 국민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김주열의 죽음의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서 국회조사단이 현지에 파견되었는데 조사단장 양일동의원은 즉석에서 “김주열은 자유당 경찰이 죽인 것이다.”라고 발표하여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으며 자유당 몰락을 재촉하는 폭탄선언이 되었다. 김주열의 시신은 병원을 에워싼 시위대의 눈을 피하여 한밤중에 남원으로 운구 되었다. 물론 경찰의 소행이다. 김주열은 그렇게 금지면 고향 땅에 묻혀있지만 4.19혁명의 상징인물로서의 면모로 마산 3.15민주묘지와 수유리 4.19민주묘지에도 각각 허묘가 조성되어 있다. 이번에 남원시(시장 이환주)에서 10년에 걸친 공사 끝에 김주열 추모공원을 완공한 것은 세계 4대혁명의 반열에 오른 4.19혁명의 기폭제가 되었던 김주열 추모에만 그치지 않고 민주화를 선도한 학생들의 의거를 만방에 다시 한 번 선양하는 쾌거라 아니할 수 없다. 추모공원은 총 3만1,760㎡의 묘역, 추모기념관, 광장, 녹지, 연못, 산책로, 주차장, 정자, 화장실 등 편의시설과 휴양시설을 모두 갖추었다. 봄과 가을에는 갓꽃과 백일홍의 화원이 되기도 한다. 민주주의를 외치다가 희생된 김주열 열사가 비록 무덤 속에서나마 57년 만에 웃을 수 있게 되었음을 남원시와 전라북도에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