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의 별칭은 ‘천년의 빛’이다. 전남에는 영광(靈光)과 영암(靈岩)이 있는데 둘 다 신령 영자를 쓴다. 두 지역 모두 이름자에 걸맞은 역사와 문화적 전통을 가지고 있다. 영광은 삼국시절 백제에 불교가 도래할 때 맨 처음 상륙한 곳이다. 또 원불교를 창시하여 익산에서 교세를 떨치며 한의학의 세계화에 공헌하고 있다. 조선 말기에는 기독교와 천주교 순교지로도 유명하다. 일본에 저항하여 의병투쟁을 전개한 이화삼(李化三)선생은 1910년1월 일본군과 전투 중 전사하였으며 광복 후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상했다. 상해임시정부에서 이시영선생을 도왔던 황덕환(黃德煥)선생은 독립자금을 모금한 죄로 일경에 체포되어 3년의 징역을 살면서 조선인을 멸시하는 왜놈 간수를 칼로 찔러 죽여 다시 사형선고를 받고 1926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모두 영광이 자랑하는 독립투사들이다. 영광 굴비의 맛을 모르면 한국 사람이 아니라는 말도 있다. 영광군에서는 해마다 대통령배 고교축구대회를 개최하여 벌써 50회를 기록하고 있다. 금년에는 축구가 진흥하려면 어린 시절부터 훈련을 쌓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한국축구클럽연맹과 함께 국회의장배 전국 유소년8인제 축구대회를 유치하여 8월17일부터 7일동안 열전을 벌이고 있다. 전국에서 50개팀이 참여한 이 대회는 초등학교 3,4학년 저학년부와 5,6학년 고학년부로 나눠 경기를 치르는데 김준성군수와 강필구군의회의장은 높은 관심을 가지고 직접 참석하여 연맹 스탭과 감독 선수 그리고 심판들을 격려했다. 비록 유소년대회지만 선수들의 패기와 실력은 프로 못지않은 용기를 뽐냈다. 특히 저학년부 선수 중에는 키가 작은 학생이 많았는데 전혀 주눅 들지 않고 오토바이처럼 내달리는 모습이 미래의 박지성이나 손흥민다웠다.
8인제지만 한 팀은 평균 20여 명으로 구성되어 학부모까지 영광을 들뜨게 했다. 남학생 일색이었지만 광주신화FC에 소속된 4학년생 심윤아양은 예쁘장한 얼굴에 당찬 축구실력을 뽐내며 유일한 홍일점으로서 운동장을 누볐다. 빨리 뛰라고 남학생들을 격려하는 씩씩한 소년의 꿈은 미래의 여자축구선수로 성장할 재목이었다. 8인제는 아직 뿌리가 내리진 못했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축구에 열광하는 나라로 월드컵을 개최하며 경기장과 선수 그리고 붉은악마로 부르는 팬들의 관심이 유난히 높다. 차범근 허정무 등은 어린 선수들의 우상이 되었으며 박지성 손흥민은 세계적인 선수로 자랑스럽다. 이번에 신태용감독은 이동국을 국가대표에 발탁하여 나이가 많아도 잘 뛰는 선수를 배제하지 않는 폭 넓은 자세를 보였다. 매너리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축구협회조차 유소년선수의 육성 필요성을 느껴 산하에 유소년연맹을 두고 경주에서 대대적인 경기를 펼친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었다. 김병환 한국축구클럽연맹 사무총장은 오랜 선수생활과 경험을 바탕으로 유소년경기의 규칙을 새로 만들고 경기장을 정비하는 등 개척자이기도 하다. 축구 활성화에 높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5.18민주화운동 부상자회 김후식 회장과 정운본 부회장이 격려차 영광을 방문하여 본회 스탭진과 즐거운 상견례를 마쳤다. 때마침 박원순 서울시장이 영광 예술의 전당에서 청소년들과 함께 토크쇼릏 펼친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함께 참석했다. 박원순은 지난번 대선에서 민주당경선에 참여했다가 사퇴한 일이 있지만 차기 유력주자로 자타가 공인하는 사람이라 군민들도 큰 관심을 보여 대공연장을 가득 메웠다. 5.18부상자회와 축구클럽연맹 관계자들은 입장하기 전 박시장과 잠시 담소를 나누는 자리를 마련했다.
나는 축구연맹 회장의 입장에서 서울시내 25개구 유소년대회를 제의했다. 짧은 대화시간이었지만 각 구청별로 예선전을 치르고 2개팀을 선발하여 50개팀이 왕중왕전을 벌리게 되면 우승팀이 언제 있을지 예상하기도 어렵지만 남북관계가 부드러워졌을 때 전통적인 경평(京平)축구와 함께 유소년대회를 순수 아마추어 차원에서 웃으며 치를 수 있지 않겠느냐 하는 제안을 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박시장은 “아주 좋은 아이디어”라고 수용태세를 보이며 영광 유소년대회 팜프렛을 받았다. 물론 서울 유소년대회가 구체화하면 서울축구협회와 공동주관을 하게 될 듯싶지만 아직 한 번도 시도해보지 못했던 대회이기 때문에 관계자들의 면밀한 계획이 수립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시작이 반이라는 속담도 있지 않은가. 한 번 제시한 아이디어를 어떻게 수용하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서울시에 달렸다. 우리가 박원순시장에게 제의한 것도 ‘즉석제안’이었을 뿐 절차를 거친 공식적인 것은 아니기 때문에 좀더 면밀한 검토가 필요할 것으로 생각되지만 마다 할 하등의 이유도 없다고 생각된다. 박원순은 영광군민들과의 허심탄회한 토크쇼에서 자신이 살아온 어린 시절과 운동권학생으로 서울대 정문 앞에 서있는 ‘세계 최대의 파출소’(현재 중학교로 바뀌었음)에 잡혀 들어갔던 얘기를 할 때에는 나 자신 여러 차례 감옥에 드나들었던 선배의 입장에서 감명이 깊었다. 박원순의 강연은 몇 차례 들었지만 토크쇼는 처음인데 의외로 긴장을 풀고 대화하는 모습에 박수가 터졌다. 9인의 패널들도 다양하게 질문했는데 특히 육아, 주택, 교육 등 실생활 문제를 제기해도 민생시장의 면모를 과시했다. 무더운 더위를 식혀주는 한 가닥 청량제가 된 토크쇼가 된 셈이다. 정치인의 대국민설득도 패턴이 달라졌다.
전 대 열大記者. 전북대 초빙교수